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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北市淡水區公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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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 칭휘

담강 중학교의 코너에, 맥카이 가족의 묘지의 나무그늘 아래 첸 칭휘와 그의 처 나카무라 엔도가 그 옆에 누워있다.  사람들은 일본에서 산 화가로 첸칭휘를 알고있고 어떤 사람들이 알고있지 않은 것은 그는 맥카이 목사의 손자라는 것이다.
첸 칭휘는 1910년 4월 25일 태어났으며 그는 원래 선교사 쿼 수이롱의 아들이었다.  그의 모계쪽 삼촌 첸 칭이 목사가 매케이 목사의 큰딸과12년간의 결혼 생활 중 아이가 없어, 첸칭휘는 유아시절에 첸 칭이에 의해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 그는 첸 목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교토에 머물고 수학을 마쳤다. 첸 칭이 목사는 그의 아들이 의학이나 사회서비스에 탁월하리라고 기대했다고한다.그러나 첸 칭휘는 그의 생애의 직업으로 예술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첸칭휘는 그의 조부가 그랬던 것 처럼 교회에 헌신했다. 따라서 1932년 졸업 후, 첸은 교회가 설립한 탐선 여대와 탐선 중학교로 돌아와 1968년 사망할 때까지 교수로 지냈다.
첸 칭휘는 다혈질과 극단의 예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절반을 미술 교육에 헌신했다.  그는 학생이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에 관계 없이 끈기있게 가르쳤다.  교실 밖에서도 그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길 즐겼다.그는 학생들을 종종 강변과 어부들의 항구와 학교 인근으로 데리고갔다.  그는 학생들을 발리로까지 데리고가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도록 했다. 첸 교수는 이러한 전람회에서 돈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돈으로 재료비를 지불하기도 했다. 그의 교육에서의 위대한 성과는 예술이 아니라 그의 자선이었다.
첸 칭휘는 또한 관대한 사람이어서 돈 관리에 허술했다. 그가 봉급을 받을 때마다 그는 먼저 빚을 갚아야해서 이후 돈이 얼마 남지 않게 되곤 했다. 첸 화백은 1968년 6월 16일 대북 맥카이 기념 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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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更新日期:20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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